"모든 일은 그곳에서부터 시작되었지. 그래, 드미첸 가에서부터 말이야. 그 노인네의 머릿속에서부터."
-작전개시 12시간 전.
재떨이 안에 쌓여있는 꽁초 무더기가 눈 안에 들어왔다. 순간 그나마 좀 괜찮은 꽁초라도 건져 볼까, 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맙소사.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이틀 묵은 재떨이에서 내가 도데체 뭘 건진다고? 그것도 내가 핀 담배도 아닌데?
몸서리를 한번 치고는, 나는 재떨이에서 시선을 옮겨서 머리를 좀 굴려보기 시작했다. 좋아. 이틀 전 들었던 마틴의 말은 꽤 그럴듯했다. 하지만 그래도 의문점은 남는다. 어째서 루인은 굳이 그런 '귀찮은' 짓을 했을까? 마틴은 뭐, 단순히 가학심리에서 비롯된 장난질, 혹은 독실한 신자인 드미첸을 위한 배려의 일환일 거라고 말은 했지만, 여전히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내가 뭐 진짜로 만물가게 주인장인 루인이 되어 본 것도 아니고, 게다가 루인을 만나본 거라곤 맨 처음 접선, 그리고 브리핑 때 말곤 없었긴 하지만 그래도 뭐라고 해야 할까, 루인은 마틴이 말한 것처럼 일처리를 할 것 같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았으니까.
자, 한번 생각을 해 보자. 어차피 거래는 틀어졌고, 만물가게 측에서 드미첸 영감에게 그렇게 엿을 먹이고 싶었다면 그냥 거래를 거부하는 게 제일 속 편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굳이 비싼 비용을 치뤄가면서 물건 하나를 줘서 귀찮게 만드는 건 애들이나 할 짓이니까. 물론 만물가게 측에서 그걸 '비싼 물건'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면 그건 또 다른 문제가 되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생각했다면 애초에 우리 보고 화금석이 나쁜 놈들 손에 들어간다고 막아달라는 식으로 부탁하진 않았겠지.
반대로 한번 생각해보자. 과연 그렇다면 그 행동은 신자였던 아크 드미첸 옹을 위한 배려였을까? 그렇게 보기도 힘든게, 그런 식으로 뭐, 잘은 모르겠지만 신께서 주신 운명이 어쩌고 할 거면 그런 안배 따위를 하느니 차라리 솔직하게 '죄송합니다. 찾긴 찾았는데 이 분도 심장이 영 약한데요' 라고 이실직고하는게 훨씬 더 맞는 설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왜 마틴은?"
중얼거려봤지만 끝이 없었다. 제기랄. 한 번 의심을 하기 시작하니 의심이란 놈이 끝을 보이지 않을 기세로 찾아오고 있었다. 머리가 복잡해지는 느낌에, 나는 결국 재떨이를 집어들었다. 다행히도 장초를 찾아서 재떨이를 까뒤집어 보이는 몰상식한 짓은 저지르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물론 재떨이를 쓰레기통에 거꾸로 뒤집어 털면서 입 끝에 쓴 맛이 돌긴 했지만 말이다. 세상에. 이러다가 진짜로 담배를 사게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입맛이 더 써지는 느낌이었다.
"재미있는 가정이군요. 뭐, 딱히 부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긍정하는 것도 물론 아니지만."
낡은 망토를 둘러쓴 남자의 말에, 긴 머리의 남자는 의외로 쉽게 대답했다. 별로 중요하거나 숨길 것도 아니라는 듯한 태도였다.
"보도 관제는?"
"요청은 일단 다 끝냈습니다. 뭐, 그건 치안 당국하고 드미첸 가, 그리고 만물가게 측에서 해결할 문제겠죠."
다 피운 시가를 재떨이에 털어넣고, 제르보스는 갈라진 목소리로 내뱉었다.
"우리가 작전에 투입한 요소는?"
제르보스의 질문에 안경을 쓴 여성은 사무적인 말투로 대답했다. 생긴 인상착의로 봐선, 그러니까 대충 걸친 듯한 하얀 가운에다가 방금 자다 일어난 듯이 사방팔방으로 뻗쳐 있는 머리, 누가 돈을 주고 그렇게 입으라고 해도 거절할 가운 아래의 하와이안 셔츠와 트레이닝복 바지를 봐선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답변이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센트리(Sentry) 56기, 골렘 20기, 작전과 소속 에이전트 케이트 외 에이전트 2명입니다. 본 작전은 드미첸 가의 보안경호팀과 같이.."
"무지막지한 기계 투입량에 비해서 에이전트는 적군. 상대께서 상당히 강한 걸로 아는데 이걸로 문제 없나?"
"어차피 이기려고 하는 게임은 아니니까요, 보스. 시간만 끌어도 우리가 이기는 상황인데다가, 혹시나 에이전트를 잃거나 하면 곤란하니까요.....흐암."
"우리가 상대할 마법사가 아침 종치면 칼퇴근하는 야근 공무원인 줄은 몰랐는데."
"그가 그렇게 하겠다고 작정한 이상, 그에게 있어서 그건 이미 언령(言靈)일 걸요. 특히나 마법사니까. 우리가 할 건 그가 공언한 시간까지만 버티면 되는 거구요."
"우리 하는 짓에 따라서 내용을 실시간으로 바꾸고 있는데 언령이라고?"
"아직 가마에 넣지 않은 흙덩어리라고 생각하시면 될 거에요. 실린더에 장전된 총알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일단 가마에 들어가거나, 격철이 화약을 때리게 되면 돌이킬 수 없죠. 그 전까진 마음껏 수정할 수 있겠지만."
".............정신나간 놈이라 그런진 모르겠지만 좀 이해하기 좀 힘들군."
"마법사란 종족들이 다들 그렇죠. 상식을 비틀고 무시하는 대신, 일반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얽매이기도 하니까요. 뭐, 저도 그렇고."
여성의 말에 제르보스는 책상 위에 놓인 시가 케이스에서 시가를 하나 꺼냈다. 시가 끝을 대충 잘라내고 붙을 붙인 다음, 제르보스는 여성에게 다시 말했다.
"좋아. 뭐, 우리 특무운송국 지부에서 가장 유능하신 분의 이야기니 납득하도록 노력은 해 보지.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은게 있는데......."
말과 동시에 제르보스는 보고서의 한 부분을 손으로 탁, 탁 튕기면서 여성에게 말했다. 방금 전의 여유있는 말투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이 작전 배치도에서 가장 궁금한 부분인데 말야, 아스티아 주임. 랭크 1인 필리아부터 랭크 5까지는 각자의 업무라던지, 뭐 골치아픈 사정 때문에 사용할수 없다곤 하지만....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나? 랭크 6, 8인 오르샤나 마틴이 거기 가지 않고 굳이 랭크 17, 그것도 신참인 케이트 플레처를...."
"제대로 보신 거 맞습니다. 최후의 보루에요."
"아직 실적도 검증되지 않은 풋내기가?"
"자세한 것은 사원 신상정보하고 인사행정부의 기록을 보시면 아실 거에요. 특별한 존재죠. 그 마법사와 맞먹을, 아니 그를 능가할수도 있는 신비를 가지고 있어요."
"인사행정 기록 정도는 다 알고 있어. 그래서 이해가 안 간다는 거지."
툭, 툭, 제르보스는 계속 종이를 쳐가면서 아스티아라고 불린 여성에게 대답했다. 툭, 툭, 툭. 종이를 치는 속도가 조금씩 더 빨라졌다.
"실적 수준은 백지, 육체적 수준은 꽤 괜찮긴 하지만 어쨌든 일반인 레벨. 마법사의 가계를 타고났지만 마법은 쓸 수 없음. 이 요소들에서 어떻게 정신나간 마법사에게서 우리 공주님의 심장을 마지막으로 지킬 최후의 보루를 연상할수 있지?"
"틀렸어요, 보스. 마법사의 가계를 타고났지만 마법을 쓸 수 없는게 아니에요. 마법사의 가계를 '타고났기 때문에' 마법을 쓸 수 없는 거죠."
-작전개시 5시간 전
"뭐, 어쨌든 신비라는 거에 의지하는, 혹은 의지하길 바라는 놈들이 다 그렇지. 모두 조금씩 정상에서 엇나간 놈들이라고. 나처럼 완전히 맛이 간 놈은 빼더라도."
긴 머리의 남자가 내뱉은 질문에, 낡아빠진 망토를 뒤집어쓴 마법사는 그렇게 대꾸하며 웃어보였다. 이가 훤히 보이는 미소였다.
-작전개시 4시간 전
"뭐야, 결국 그 애한테 제대로 말해준 건 하나도 없네."
"몰라도 일 하는데는 지장 없으니까."
퉁명스러운 대꾸가 돌아왔다. 이제는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만일 '이걸로 사냥이나 한 번 해보시겠습니까?' 라고 정중히 요청하면서 건네준다고 해도 쓰기 망설여질, 그러니까 아직 전장에서 현역으로 쓰일 무기라기보다는 벽난로 위 장식장을 장식하는 편이 훨씬 더 어울릴 것 같은 고색창연한 머스킷 라이플을 만지작거리며 오르샤는 그 대꾸에 대답했다.
"왜. 평소에는 자기 우울한 이야기는 다 말하고 다니더니. 감봉이라던지, 누가 휘말려서 중상을 입거나 죽었다던지...."
"그거하고 이거하고 경우가 똑같냐, 멍청아."
"안 똑같아? 개인적인 비극은 나눠서 줄이는 게 최고라면서."
"어, 안 똑같아."
다시 또 퉁명스러운 대답. 오르샤는 그 대답에 비속어, 혹은 육두문자를 내뱉는 대신에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피를 물었다. 대충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인 다음, 한 모금을 내뱉은 후에야 오르샤는 마틴에게 다시 말을 꺼냈다. 마틴은 오르샤를 쳐다보지도 않고 자기가 쓸 무기들을 손질하고 있었다.
"거 되게 꽁해있네. 자기 그렇게 속 좁은 사람이었어?"
"야, 소름 돋는다. 뭔 놈의 자기야, 자기는. 언제 네가 내 연인이라도 됬냐? 얼음 마녀님."
"그 이미지도 다 직접 유포하고 퍼트린 거면서 왜 그러셔요, 직장 상사님. 덕분에 나만 보면 약이라도 한 것처럼 몸 떠는 자식들이 한둘이 아닌데."
"그럼 내가 언제 거짓말 하던가? 진짜로 그러기도 하시면서 왜 그러셔요. 신입 녀석이 너 보고 오금이 저리다고 하더라."
"그건...............그 애가 타이밍을 잘 못 맞춰서 온거고."
에라, 모르겠다- 라는 중얼거림과 함께 마틴은 등을 돌렸다. 오르샤의 얼굴을 마주보는 위치로 돌아온 마틴은 오르샤를 향해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온 거에 짜증이 날 지경이야."
마틴의 말에 오르샤의 눈이 살짝 크게 떠졌다. 하지만 마틴은 그런 표정 변화따위에는 눈길 하나 주지 않고 계속 이야기했다.
"벌써 7년 전이던가,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뭐, 그걸로 끝난 줄 알았지. 뭐, 영감님 덕분에 좀 찝찝한 기분은 남았지만 어쩌겠어. 우리 일이 다 그렇잖아. 일 한번 끝나면 뒤돌아볼 필요도 없고, 아니 뒤돌아보려고 해도 다른 일들이 워낙 많아서 뒤를 돌아볼 짬 따위가 나올 수가 없지.
그런데, 이미 끝난 걸로 알고 있던 일이 결국 돌고 돌아서 다시 나한테 또 일이 떨어지는건 도데체 뭐냐고. 그냥 좀 잊고 잘 살아보자는 사람한테 이럴 수 있느냐 이거야. 제기랄. 나도 그렇고, 그 심장이 금덩어리 제조기인 아가씨도 그렇고."
"귀찮게 됬네. 한 번 했으면 끝날 줄 알았더니 애프터서비스까지 해주는 꼴이잖아."
"그렇게 됬수다. 네. 더 슬픈 건 거절도 못 했다는 거지요."
마틴의 말에 오르샤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마틴은 어느 새 다시 등을 돌려 개인 화기를 다시 손질하고 있었다. 등밖에 보이지 않는 마틴의 모습에 대고, 오르샤는 혼잣말이라도 하듯이 내뱉었다.
"역시 당신은 군인 체질은 아닌 거 같아."
"왜. 직장 상사이자 전 군대 상관인 사람이 그래서 실망스러워?"
"아니."
조용한 목소리로 오르샤는 마틴에게 대답했다.
"난 당신이 그래서 좋아. 그 애도 아마 그렇지 않을까."
"그래서......... 어쨌든 할 거라는 거군요."
"뭐 그렇게 뻑적지근하게 초대장도 보냈는데 그럼 설마 안 할까. 이봐, 점장님. 이미 이건 나한테 있어서 언령이라고, 언령. 자물쇠란 말이야."
"귀찮으신 분이군요. 가게를 어지른 건 나중에 청구하겠습니다."
"배상은 화금석 찾아오면 그걸로 하지. 괜찮나?"
자랑스럽게 내뱉는 낡아빠진 망토의 마법사가 내뱉는 말에 긴 머리의 청년은 쓴웃음을 지었다. 청년의 반응에, 마법사는 즐거운 듯이 외쳤다.
"그럼 가볼까, 정의의 용사와 마법사 정도라면 악의 무리가 있는 저택 정도 쓸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라고. 진짜야. 그리고 저택 앞에서 한 번, 나쁜 놈을 쓰러뜨리고 공주님을 구한 다음에 다시 한 번 이렇게 외쳐주는 거지. 막이 올랐다, 막이 내렸다! 악하고 무도한 놈들아! 공주님을 구하러, 공주님을 구한, 위대한 용사님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라고. 어때. 폼 나지 않냐?"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긴 머리의 청년을 뒤로 한 채 낡아빠진 망토의 마법사는 망토를 펼쳐 하늘로 비상했다.
******
아무도 없는 곳에서, 심장에 무엇으로도 설명하기 힘든 신비를 숨긴 공주님은 말했다.
"곧 막이 오르겠군요."
시간이 별로 없다는 생각을 하니까 글이 술술 나오네요. 헐.......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가곤 있습니다. 넹. ㅇㅇ



덧글
팅뤠 2009/08/25 12:54 # 답글
아옼아옼 바로 이거야 이런 분위기! 아 페머터도 머시따() 히히히히히히ㅣ힐히히힣히< 다음화도 기대하겠음 하악하악//
붉은바람 2009/08/25 17:29 #
사랑은 총알을 타고 'ㅅ'
히테이 2009/08/25 13:35 # 답글
흑흑흑 오르샤땅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나랑 결혼해줘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이거슨 감상입니다 글설리가 아닙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붉은바람 2009/08/25 17:31 #
JYP가 부릅니다. 니가 사는 그 집내 것이었어야 해~
이루엘 2009/08/25 15:15 # 답글
잘 읽었음. 아스티아도 등장했군.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페머터'와 '흑익대공 페머터'는 이름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인물인가?
붉은바람 2009/08/25 17:33 #
백수 패션이 매력적인 아가씨지 ㅋ...그 흑익대공이 맞긴 합니다만 뭐 애초에 익스프레스의 캐릭터들도 판타지아 쪽과는 다른 면이 있으니 'ㅅ' 패러렐? 그 정도로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