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및 작업물 Hermes Express / 09 2009/09/02 03:47 by 붉은바람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내가 바라는 건............"

-검은 가시의 마법사.


 


 




드미첸 가에서 10년간 보안팀장으로 근무한 동안, 멜리사 마카키스는 이상한 놈들에겐 이골머리가 났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최근 몇 년간의 사례를 예로 들 필요도 없이 드미첸 가의 재산들 중 일부분 몇 개를 노리고 찾아오는 불건전한 마음 솜씨의 양상군자들도 충분히 이상한 놈들 딱지를 붙이기엔 충분한 놈들이었지만, 최근 몇 년간 찾아오던 빌어먹을 정신나간 놈들,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팔다리가 괴생물체도 아니고 바깥쪽으로도 꺾어지는 놈부터 시작해서 하늘로부터 거꾸로 떨어져내려오는 놈, 땅에서 헤엄을 치는 놈(단순히 웃겨보려고 하는 땅 짚고 헤엄치는 짓거리가 아니라), 심지어는 총을 맞고도 미친 듯이 낄낄대면서 걸어오는 정신나간 놈까지 상대해본 터에 뭐가 무섭겠냐, 라는 게 그의 말이었다. 덕분에 드미첸 가의 수호자 역할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젋은 녀석들은 그를 똑같이 약간 정신 나간 사람이라던지, 괴물이라던지, 심줄이 고래 심줄이라던지 하는 식으로 궁시렁대기는 했지만, 마카키스는 그런 호칭에 화를 내는 대신에 그런 호칭으로 부르는 녀석들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뭘 그러십니까, 제군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저 혼자가 아니라 여러분들 모둔데요. 만물가게를 잊으신 건 아니겠죠?

 

그런 식이었다. 만물가게라고 하는 똑같이 정신나간 듯한 도우미들 덕분에 마카키스는 사실, 작전이 시작되었다고 했을 때에도 별 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다. 만물가게의 통보는 이전보다 약간 늦기는 했지만 그래도 적절한 수준에 도착했고, 지급된 물품들도 항상 똑같았다. 괜찮습니다, 제군들. 우리에겐 반드시 맞는 총이 있고 녀석들의 저항을 막아줄 것들도 많습니다. 간 크게 덤벼오는 놈이 있다던데, 뭐 이번에도 쉽게 밟아주도록 하죠. 자, 준비 됬습니까?

 

"..............말도 안 돼...."

 

그리고 30분 후, 마카키스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그것 하나뿐이었다.

 

******


건드리면 깨질 것 같은 하얀 달이 하늘에 매달려 있었다. 페머터는 그것을 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우라지게 좋은 달빛이군. 자, 그러면 시작해 볼까."

 

찢어지고 해진 데다가, 바람이 없는 곳에서도 살랑거리며 찢어진 부위를 뽐내는 듯한 망토 안쪽에서 예고장을 꺼내 튕기며 마법사는 중얼거렸다.

상대는 이미 이 예고장이 자신에게 있어서 언령(言靈)이나 다름없는 놈이 됬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고, 친절하게 적어준 대로를 보고서 그에 따른 대비책을 세워놨을 것이다. 물론 원하던 바긴 했다. 어차피 그렇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귀찮은 방법을 쓴 거였으니까. 물론 스스로 자기 손발을 묶고 싸우는 게 취미는 아니긴 하지만, 뭐, 이 정도의 핸디캡 매치에서도 이기지 못한다면 결국 자격 미달, 간단히 말해서 탈락 아니겠냐고 그는 스스로에게 대답했다.

 

"뭐.. 어떻게 되던 간에 재밌긴 하겠군. 예고장 미리 보내준 그 아가씨는 어디 가 있을지 궁금한데."

 

달빛을 뒤로 하고 있어 실루엣만 보이는 드미첸 가의 저택을 마주 본 채로, 그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딱,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페머터가 두르고 있었던 망토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거센 바람도 없었고 망토를 뒤흔드는 어떠한 손길도 없었지만 찢어지고 해진 망토는 꾸준히 요동치며 주위에 검은 잔영을 남겼다. 그렇게 페머터 주위를 꿈틀거리던 망토가 문득, 바람도 없고 자기를 뒤흔드는 손길도 없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달았다는 듯이 멈췄을 때, 그의 주위에는 이미 수십 마리의, 어느 무엇과도 닮았다고 하기 힘든 모양새를 지닌 네 발 달린 짐승들이 바닥을 긁으며 낮게 으르렁대고 있었다.

 

"그럼 가볼까, 개들아! 듣고 있나, 저택의 제군들! 검은 가시의 용사 페머터께서 공주를 구하러 나가신다!"

 

소름끼치도록 하얀 달과 어두운 실루엣의 저택을 바라보며 페머터는 이를 잔뜩 드러내고 웃어보였다.

 

******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요."
"어...어, 네?"

 

적막한 방에서 말을 먼저 꺼낸 것은 그녀였다. 방 자체는 그냥 평범한 여자애의 방.........이라고 하면 좀 어폐가 있을 생김새긴 했지만, 아무튼 생긴 게 예상했던 것과 그다지 큰 차이를 보이진 않았다. 나무로 정성스레 깎아 달은 듯한 나무 창틀과 천장에 달린 유리등, 고풍스러운 모습의 가구들 등등. 문제가 있다면 역시 너무 커서 그렇게 가구가 자리를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살풍경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방이 밖의 상황 덕분에 거의 격리되었다고 봐도 좋을 정도라(마법이라던지, 바리케이트라던지, 혹은 둘 다 썼다던지 아무튼 그런 방식으로) 방의 적막함은 다른 곳의 몇 배는 되는 것 같았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자기 심장 고동 소리가 들릴 정도로.

 

"마법사라면서요? 안경 쓰고 흰 가운 입은 언니가 그러던데."
"아, 뭐, 음..... 쓸 줄 아는 마법은 하나도 없지만요."
"어, 마법사인데요?"
"그러게요."

 

내가 생각해도 힘 빠지는 대답이었다. 피식, 웃어보이자 비스콘티 드미첸은 밝게 미소지어보였다. 별로 상관 없다는 듯한 미소였다.

뭐, 사실 아무도 신경쓰지도 않고 나도 기억 한구석에다가 처박아 두는 사실이긴 하지만, 내 혈관에도 마법사의 피란 게 흐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흐르기는 한단다'. 물론 직접 확인해 볼 수 있을만한 믿을만한 마법사가 없어서(굳이 말하자면 있긴 하지만 그 사람들하고 그다지 친하지 않다는 게 문제다. 별로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없고)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말이다. 아버지는 평범하셨고 어머니도 역시나 마법이라면 해리 포터나 반지의 제왕같은 환상 소설의 제목을 떠올릴 정도로 평범함의 극치를 달리시는 분이셨지만, 할아버지께서는 아니셨던 모양이다. 스무 살이 갓 되고 나서 이제 독립하겠습니다, 라고 했을 때 부모님은 나를 앉혀놓고 '그래도 여자인데 혼자 살 수 있겠니?' 등등의 으례 부모님들이 하실 걱정섞인 이야기를 하시는 대신에, 이런 이야기를 하셨었다.

 

너는 마법사의 자손이란다. 너희 할아버지께서도 위대한 마법사였지. 아무것도 없이 물잔에서 와인을 뽑아내고 라이터 없이 시가에 불을 붙이실 수 있으셨단다.

당연히 내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이거였다. 하? 그게 무슨 늑대가 여물 뜯어먹는 소리에요? 스무 살 되서 들려주신다는 이야기가 기껏 애들 장난...

 

"언니?"
"아, 어, 어...네? 저, 저요?"
"그럼 언니 말고 또 다른 사람이 있나요?"

 

드미첸의 말에 나는 회상을 멈췄다. 적막하던 방의 문 너머로, 미약하지만 총성이 울리고 있었다. 간헐적인 총성이 아니라 연속적인 걸로 봐서는 센트리가 작동중인 것 같았다. 이런 제기랄, 벌써 센트리가 설치된 곳까지 온 건가? 라는 생각에, 나는 허리춤에 꽂아뒀던 권총을 꺼냈다. 솔직히 그 정신나간 마법사가 온다고 했을 때 권총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괜찮아요?"

 

드미첸의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맙소사. 내 표정이 어떤 진 몰라도 상태가 안 좋아보였나보다. 이래서야 내가 드미첸에게 보호받는 것 같잖아, 라고 속으로 중얼거린 다음 나는 그녀에게 대답했다.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거두지 않고 있었다.

 

"드미첸 양이야말로 괜찮아요? 총성도 울리고, 무서울 법도 할 텐데..."
"아뇨, 괜찮아요. 정말로요."

 

미소를 지은 채로, 드미첸은 대답했다.

 

"아버지는 제가 항상 웃는게 좋다고 하셨어요."

 

******


공기를 찢어발기는 듯한 기관총의 폭음이 페머터의 귀를 때렸다. 망토를 펄럭여 날아오던 총탄들을 전부 바닥에 떨궈버린 페머터는 자기 주위를 미친 듯이 돌아다니는 짐승들을 보며 커다랗게,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서른 다섯! 서른 일곱! 서른.......아홉!"

 

심각한 상황에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숫자놀음질이냐고 외칠 사람이 있을 법도 했지만 그런 비난을 토해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비난을 내뱉을 수 있는 사람 중에서 멀쩡히 서 있는 사람은 원래 있었던 방어측 인원의 절반도 채 안 됬으니까. 어떤 동물도 닮지 않았지만 아무튼 주인이 개라고 불러서 개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동물에게 물어뜯긴 사람, 어깨나 팔이나 그 외 기타 사지 등등에 말뚝만한 가시가 박힌 사람 등등. 다행인지 불행인지 급소를 맞은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반쯤 녹은 동물의 잔해와 함께 벽에 달라붙어 있거나 말뚝만한 가시 덕택에 곤충 표본마냥 벽에 박혀있는 처지에서 숫자놀음 따위에 태클을 걸 수 있을만큼 배짱좋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덕분에, 아직 동물 이빨이나 말뚝이 몸에 박히지 않은 멀쩡한 사람들은 정신나간 마법사가 내뱉는 숫자들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물론, 마법사가 말하는 숫자놀음이 뭔지 알고 있다고 해서 멀쩡한 사람들에게 '제발 숫자 같은건 그만 외치고 닥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자기가 그 숫자 안에 들어가는 건 그다지 유쾌한 체험은 아니었으니까. 사람도 그 정도일진대 일부 구간에 고정되어 있는 센트리나, 굼뜬 골렘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무생물이었기 때문에 사람보다 훨씬 끔찍한 모양새가 되셨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 잡음 따위를 내뱉지 않았다는 것이 벽이나 바닥에 꿰여 있는 사람들과의 유일한 차이점이었다.

 

"마흔하나! 마흔셋! 마흔.....넷?"

 

총성이 멈췄다.
총성이 멈춘 자리를 메꾼 것은 훈장처럼 자랑스럽게 검은색 말뚝들을 몸 한구석에 하나씩 달고 벽, 혹은 바닥, 가끔 어떻게 올라갔는지는 몰라도 천장에 처박힌 사람들의 신음소리와 유일하게 멀쩡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여성의 알아듣기 힘든 중얼거림이었다. 마법사의 시각으로 봐도 꽤 탄탄한 무장 상태에다가 총도 정확히 겨누고 있었지만, 볼썽사납다 못해 어디 아픈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여성의 모습에 페머터는 혀를 한 번 차고 내뱉었다.

 

"이봐, 아가씨. 볼썽사나우니까 몸은 그만 떨고 내 질문에나 대답하지 그래. 마흔 넷, 맞아?"

 

마법사의 말에 여성은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마법사는 끈질기게 다시 질문했고, 그제서야 여성의 입에서 간신히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을만한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물론 마법사의 질문에 대해서 친절하게 대답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째서....어째서 이런...."

 

물론 페머터도 여성의 질문에 대답해주지는 않았다. 불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짓던 페머터는 망토와 옷자락에 묻은 먼지와 화약가루 등등을 털어내면서 숫자를 다시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아까전 격양된 목소리와는 다른, 그냥 시장에서 과일 갯수라도 세는 듯한 말투였지만, 여성은 아까 전 격양된 목소리로 내뱉던 목소리보다, 시장에서 물건 세는듯이 아무렇게나 내뱉는 목소리가 훨씬 더 공포스럽다고 생각했다. 바들바들 떨리던 총을 똑같이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다시 장전한 다음, 여성은 쥐어짜듯이 내뱉었다. 아까 전의 웅얼거림과는 다르게, 폐에 남아있는 공기를 전부 긁어내서 토해내는 듯한 절규에 가까웠다.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우리에겐 총도 있고, 마법을 막아준다는 도구도 있고, 그 빌어먹을 만물가게인지 뭐인지 하는 놈들의 도움도 있고, 익스프레스인가 하는 녀석들의 도움도, 도움도 있었는데, 아니, 아니, 애초에 당신은 그, 그 전에 도데체 왜....."

 

여성의 절규에도 마법사의 숫자 세기는 끝나지 않았다. 스물아홉, 서른, 서른하나, 서른 둘, 서른 셋.

천천히, 서두르는 기색 없이 손가락을 일일히 벽이나 천장, 바닥 등등에 꿰이고 달라붙은 사람들에게 가리키면서 그는 숫자를 세 나갔다. 천천히 숫자 세는 소리와, 처음부터도 심하게 갈라지고 버벅거렸지만, 이젠 숫제 무슨 소리인지도 알아듣기 힘든 웅얼거림으로 다시 돌아간 여성이 토해내는 소리, 물어뜯을 것을 찾지 못해서 안절부절하는듯이 바닥을 긁으며 낮게 그르렁거리는 짐승들의 숨소리 등등이 섞여서, 아무리 봐도 좋은 광경이라고 봐 주기는 힘든 저택 안을 채우고 있었다.

 
서른아홉, 어째서, 마흔, 그러니까, 마흔 하나, 왜, 마흔 둘, 이런 일이, 마흔.............셋.

숫자 세기가 멈췄다. 지겹다는 표정을 지어보며, 마법사는 여성을 향해 내뱉었다.

 

"잘못 셌군. 뭐 자네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거에 비하면 이 정도야 약과지만."

 

여자의 눈이 크게 떠졌다. 커진 눈을 퀭하니 뜨고 있는 여성을 향해 마법사는 씹어뱉듯이 계속 말했다.

 

"왜 그러냐고? 이전에 화금석을 가지러 온 놈들하고 뭐가 다르길래? 화금석을 가지고 가서 뭐에 쓸 거냐고? 글쎄? 내가 알 게 뭐야. 이전에 찾아온 어중이떠중이들에게야 뭐, 화금석인가 뭔가 하는 걸 가지고 있으면 영생을 얻을 수 있겠지, 금을 찍어내 부자가 될 수 있겠지, 하다못해 뭐 어디엔가 쓸 데가 있겠지 등등의 시답잖은 이유가 있었겠지. 그래서 자네들 같은 실력으로도 막을 수 있었던 거고. 방해요소 같은 걸 뚫고, 돌파하고, 회피하고 하는 것들은 놈들에게는 말 그대로 부차적인 것들이야. 주 목적이 아니라고. 난 녀석들과 반대지. 화금석은 부차적인 요소고, 주 목적은...."

 

마법사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천천히 선고하듯이 말했다.

 

"자네들과 한 판 거하게 놀아보는 거지. 1라운드는 내가 이긴 것 같군. 자, 자네는 어떻게 할 거지?"

 

******


"드미첸 양, 그러니까...음...아버지, 아, 아니. 드미첸 옹께서는 어떤 분이셨나요?"

 

내 말에 드미첸 양은 미소를 잠깐 거뒀다. 뭐, 그렇다고 해서 무표정이나 기분나쁘다는 표정이었다는 건 아니고, 짓고 있던 미소가 약간 옅어졌다, 라는 정도였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드미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글쎄요."

 

드미첸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예상에서 한참 벗어난 소리였다. 아버지라는 단어를 말할 때의 미소라던지, '아버지는 웃는 모습이 좋다고 하셨어요' 라는 말이라던가. 게다가, 모르긴 몰라도 양아버지였던 아크 드미첸의 모습이었다면 아무리 적어도 '괜찮은 분이었어요' 쯤 되는 답변을 예상하는 게 당연할 것이다. 굳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도. 그런 탓에 드미첸의 '글쎄요', 라는 상당히 애매한 답변은 상당히 의외였다. 좋거나, 아니면 드미첸 옹의 호의가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럽다고 느껴져서 불편했다고 말했다면 또 모를까.

 

"물론 양아버지께서는 절 친딸처럼 사랑하셨어요. 정말로. 제가 정말로 그분의 딸인 것처럼요. 부족한 것도 없었고, 제가 부담스러워 할까봐 너무 부담스럽지 않느냐고 물어보기도 하셨고, 어디가 불편하다고 하면 새겨들으시는 분이었죠. 신심 또한 깊으신 분이었어요. 항상 아침저녁으로 신께 기도를 하셨고, 식사를 할 때마다, 그리고 하루 일과가 끝날 때마다 기도를 하셨죠. 신이시여, 감사드립니다. 저에게 이 모든 것을 허락해주셔서. 행복함을 알게 해 주시고, 감사할 수 있게 해 주셔서- 라고."

 

말이 끝나고 잠시 또 짧은 침묵이 있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짧은 침묵이었다. 목을 가다듬고는 그녀는 다시 말했다.

 

"그래서 모르겠어요. 양아버지께서는 좋은 분이셨지만, 저는 엄밀히 따지면 그분의 딸이 아니잖아요. 그 분의 대용품은 될 수 있겠지만, 대용품이 진짜를 대체할 수는 없으니까요. 모르겠어요. 어째서 그런 분이, 좋은 아버지이자 신실한 사람이었던 사람이, 그래서 수십 년 동안 만물가게의 제안을 거절해왔던 분이, 어째서 '딸의 대용품' 같은 걸 찾을 생각을 했는지요. 과연 어떤 분이었을까요, 아버지는? 강인했던 사람? 아니면, 보통 사람들처럼 나약하고 의지할 것이 필요했던 사람일까요?"

 

말을 마치고 드미첸은 아까 전보단 나은, 하지만 여전히 엷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미소라기보단, 쓴웃음을 짓는 것처럼 보였다.

 

******


여성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절망감에 가득 찬 얼굴을 여전히, 무덤덤하고 지겹다는 듯이 바라보던 마법사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동시에 공중에 떠 있던 수십 개의 가시들이 여성에게 겨눠졌고, 바닥을 긁으며 그르렁대던 짐승들도 일제히 고개를 쳐들었다. 바닥을 긁던 짐승들의 소리도, 마법사가 세는, 귀를 긁는 듯한 숫자 세는 소리도 없어졌지만 여성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는 듯이 무릎을 꿇었다.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푹 숙이고 울먹이는 것처럼 어깨를 들썩거리는 여성의 모습을 본 마법사는 그대로 손가락을-

 

탕!

 

손가락을 튕기려던 마법사의 눈에, 총성과 함께 날아오는 탄환이 보였다. 빠르긴 하지만, 탄환 치고는 보통 사람의 육안으로도 간신히 쫒아갈 수 있을만한 속도를 보여주는 탓에 마법사는 자기를 향해 날아오는 탄환이 어떻게 생겼는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화약의 도움으로 탄피와 갓 이별한 탄두의 모습이 아니라 둥글둥글한, 총이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나 썼을 법한 탄환이었다.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대로 망토를 휘둘러 탄환을 바닥에 떨궈버리려던 페머터는, 망토를 휘두른 다음 자기의 눈을 잠깐 의심했다.
탄환이 망토를 '피해서' 날아오고 있었다. 탄환이 아니라 새, 혹은 전투기나 보여줄 만한 궤적을 그리며 날아오는 모습에 페머터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내뱉었다.

 

"2라운드 시작이냐!"

 

여전히 기세를 죽이지 않고 날아오는 탄환을 향해, 마법사는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허공에서 여성을 겨누고 있던 가시와, 고개를 쳐들고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네 발 달린 짐승들이 일제히 탄환이 날아온 통로를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으르렁, 컹! 하는 짐승의 울부짖음과 가시가 뛰쳐나가며 공기를 찢는 소리가 통로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탄환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솔직히, 탄환이라기보다는 움직이는 생물체에 가깝다는 것이 페머터의 느낌이었다. 구체적으로 뭐라고 말하지 않은 건, 무정물같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느 특정 짐승이 보여주는 움직임 같은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직으로 낮게 날다가 갑자기 급상승하고, 급강하해서 날아오는 가시를 쳐내고, 자로 잰 듯한 직각이동으로 짐승들의 머리를 터트리면서 날아오는 동물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 일반인의 기준은 말할 것도 없고, 페머터가 알고 있는 온갖 무시무시하고 해괴한 짐승들의 리스트를 전부 뒤져봐도 마찬가지였다. 혀를 차고서, 마법사는 가시와 동물들을 전부 박살내고 여전히 흉흉한 기세로, '총알 치고는 느린' 속도로 미간을 향해 날아오는 탄환을 피했다.

목표롤 스치고 지나간 탄환은 다시 목표를 찾아서 급격하게 휘어졌고, 그 광경을 본 마법사는 몸을 틀고 있는 자세 그대로 탄환을 향해 팔을 뻗었다.

 

우지직, 하는 소리가 먼저 난 뒤에, 뭔가가 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골프공보다 조금 작은 수준의 탄환을 손에 움켜쥐고 있던 페머터는 미간을 구기며 손바닥을 폈다. 떨어진 탄환이 쿵, 하고 바닥과 부딪치는 것과 동시에 페머터는 자신의 손바닥을 쳐다봤다. 탄환을 손으로 받아낸 것 치곤 멀쩡하다고 할 수도 있을 모양새였지만, 커다란 탄환에 비해서 손이 멀쩡하다는 소리지 엉망이긴 마찬가지였다. 불이나 무슨 약품에 집어넣기라도 한 듯이 급격하게 썩어들어가고 있는 손의 모습에, 마법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라운드걸이나 친절하게 공을 울려준다던지 하는 건 기대도 안 했지만....마탄(魔彈)이라니 참 화끈한 라운드 시작이군."
"괴물 같으신 분에겐 그에 걸맞는 대접을 해 드려야지. 솔직히 잽 정도밖에 안 되잖아, 아저씨?"

 

페머터가 내뱉은 말에, 비꼬듯이 내뱉는 소리가 돌아왔다. 그리고, 통로에서부터 뚜벅, 뚜벅 걸어오는 사람의 그림자 둘이 페머터의 눈에 띄였다. 천천히 걸어오던 그림자 하나는 마법사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무릎을 꿇은 채로 실신한 여성을 대충 부축해 일으켰고, 나머지 그림자 하나는 좀 더 앞으로 걸어와 내뱉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저씨. 저기 마틴은 한 달 만인거 같은데..인사는 내가 대신 해도 상관 없지?"
"처음 뵙겠습니다, 아가씨. 초면부터 꽤 인상적인걸. 무자비하고, 야비하고, 강하고. 좋아. 맘에 들었어."

 

페머터의 말에 오르샤는 대답 대신 신음을 흘리며 들고 있던 머스켓 라이플을 위로 올렸다. 덜그럭, 하는 금속성이 귀청을 때리는 것과 동시에 마법사는 총잡이에게 내뱉었다.

 

"2라운드는?"
"저 아저씨가 아가씨 치워놓고 나면."

 

오르샤의 말에 페머터는 씨익, 하고 입이 찢어질 듯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마법사의 망토 또한 살아있는 생명체라도 되는 듯이 꿈틀거렸다.

순식간에, 마탄에 떨어지고 부숴지고 박살난 수십 개의 가시와 열댓 마리의 짐승들을 다시 불러낸 페머터는 목구멍이 아니라 가슴팍을 찢고 폐부에서 바로 뛰쳐나온 것 같은 커다란 웃음소리를 내뱉으며 외쳤다.

 

"좋아, 덤벼라! 익스프레스의 개자식들아! 검은 가시와 짐승의 친구이신 마법사 용사님이 나가신다!"

 

******


우르릉-!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다시 찾아온 기나긴 정적을 무참하게 박살냈다. 두꺼운 벽과 마법과 바리케이트로 가로막혀 아무것도 침입할 수 없고, 아무런 소리조차 새어들어오는 걸 막고 있을 대문을 뚫고서 들어오는 소리라면 말할 것조차 없었다. 무너지는 소리, 거친 파열음, 총성, 심지어는 욕설이나 그에 대꾸하는 거친 외침까지도 미약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물론 마지막 건 착각이었겠지만, 불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권총을 잡고, 한 손으로는 드미첸을 감싸며 대문을 쳐다봤다.

 

제기랄.
저 소리가 다시 들리는 걸로 봐서는 센트리나 골렘, 같이 작전을 수행한다고 하던 드미첸 가의 인원들은 이미 마법사에게 박살이 났고, 아마도 싸우는 건 마틴이나 오르샤라고 했었나, 아무튼 그 고독하다는 늑대, 얼음여왕 같은 여자일 것이다. 그 둘마저 뚫린다면? 마틴도 그렇고 오르샤도 그렇고 나 같은 초짜와는 달리 전쟁터 같은 환경에서, 아직까지 살아서 특무운송국에 있는 사람들이다. 아마도 다른 숙련된 사람들과 비교해도 훨씬 강한 사람들이겠지. 문제가 있다면 상대는 마법사고, 그것도 무진장 강한데다가 제정신이 아니기까지 한 남자다. 과연 육체적으로까지 강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법사라는 것부터가 이미 일반인들과는 비교 자체를 불허하는 수준이라 굳이 고려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마법사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험하다. 나 같은 얼치기, 마법이라고는 단 하나밖에 쓰지 못하는 녀석은 빼고.
손이 떨려왔다. 무섭다, 라는 감정이 조금씩 스멀스멀 기어들어오기 시작했다. 제발, 내가 왜 하필이면 왜 이 자리에 있는 걸까. 과연 잘 싸우고 있는 걸까, 나는 어떻게 될까, 과연 맡은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 이렇게 덜덜 떨리는데 그들은 어떨까,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드미첸은......

 

드미첸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미소는 여전히 엷었고 평소와 다르게 안색은 파리한 것 같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고요함이 찾아왔다.

 

덜컹.

 

"안녕하신가, 아가씨들."

 

두려움과 긴장감과 최악의 상황이 망토를 두른 마법사의 모습을 한 채로 대문을 거세게 열어젖혔다.




D-5입니다.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거 같습니다. 맙소샇
원래 9화에서 끝날까 했는데 한 화를 더 써야 끝날 기세.txt


트랙백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TrackbackURL : http://Eikwalts.egloos.com/tb/2479109 [도움말]

덧글

  • 이루엘 2009/09/02 15:20 # 답글

    오오... 마탄의사수 오르샤. 광인간지 페머터.
    이번화도 잘읽고 갑니당. 'ㅅ'

    과연 붑은 5일안에 완결을 낼 수 있을것인가.
    기대하겠음. 'ㅅ'
  • 붉은바람 2009/09/04 00:59 #

    맙소사 이제 3일이야........
  • xizang 2009/09/03 09:08 # 삭제 답글

    근성으로 완결내고 가세요!

    페머터는 짐승의 아이돌...[...]
  • 붉은바람 2009/09/04 00:59 #

    글쓰기는 리듬 파워 근성!
    짐승의 아이돌이라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덧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