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죽어도 혼은 남는다. 설령 혼마저 죽어도, 기억만은 남는다.
-연금술사의 노트.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아까 전과의 정적과는 차원이 다른 정적이었다. 소리가 나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그 빈 자리를 채우는 정적이 아니라, 주변의 소리를 전부 깔아뭉개 죽인 것 같은 끔찍한 정적.
"여기까지 오면서 환영해 준 인원들이 꽤 많더군. 1라운드, 2라운드 합쳐서 45 : 0. 좋은 경기를 할 수 있게 도와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대신 하고 싶군. 드미첸 가의 대표분,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으신 익스프레스의 개 아가씨."
덜그럭, 하는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그리고,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던 광경이 눈 앞에 들어왔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마법사가 바닥에 던지듯이 떨군 것은 다 망가진 머스켓 라이플과 권총이었다. 각각 손잡이에는 먼지와 긁힌 자국 덕분에 휴지조각처럼 보이는 익스프레스 사원증이 묶여 있었다. 엉망이 된 사원증이 누구의 것인지는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울컥, 하고 무언가가 올라오려는 찰나, 마법사는 씨익, 기분나쁜 미소를 지으며 자주 보여주던 그 능글능글한 말투로 말했다.
"아, 걱정 같은건 하지 말라고, 아가씨들. 그 두 분이라면 안 죽었어, 안 죽었다고. 아마 지금쯤 달빛 감상이라도 하면서 쉬고 있을걸. 포즈가 좀 불편하기야 하겠지만."
".........이, 이 빌어먹을........."
"그만, 그만. 거기까-지. 그 예쁘신 입에서 험한 말씀 하시면 쓰나. 옆엔 어린 아가씨도 있단 걸 생각하라고."
마법사의 말이 떨어지지가 무섭게 입에서 반쯤 튀어나간 폭언이 도로 목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마법사의 말대로, 드미첸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물론 내 폭언때문인지, 아니면 마법사가 왔기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이라고 내뱉은 다음 나는 권총을 페머터에게 겨눴다. 물론 마법사는 코웃음을 친 다음, 권총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이 한 걸음을 내딛으며 계속 말하기 시작했다.
"뭐, 일단 여기까지 오면서 나는 꽤 재밌게 즐겼고.... 저기서 쉬고 있을 익스프레스 분도 뭐, 즐거울 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싸움이라면 오늘 꽤 했으니 괜찮겠지. 그런데 아가씨는 어떤가?"
"...싸, 싸우는 데에는 취미 없어요."
"좋은 심성이야. 나처럼 싸움에 미쳐가지고 날뛰는 건 사실 그다지 보기 안 좋잖아. 나야 남들 신경 안 쓰고 다닐 수 있지만 자네같은 아가씨는 그게 어렵잖아. 안 그런가? 보기 안 좋아, 안 좋다고. 특히 아가씨가 그렇게 싸움에 미쳐 있는 건."
"당신이, 그, 그러니까, 그런 말 할 처지가 된다고 생각해요?"
"경험자로써의 이야기지."
반박할 여지가 없는 말에 또 할 말이 쑥 들어가버렸다. 직접 의뢰주 심장을 뽑으러 온 마법사가 눈 앞에서 언제쯤 심장을 뽑아갈지 모르는 상황치곤 너무 여유있는 대화라는 점 덕분에 불편함은 더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말장난만 하고 있을 거지, 이 남자는?
"그래서 미안하지만 일단 아직 못 본 재미부터 보도록 할까. 일단 첫 번째로는...."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아무것도 없던 공중에서 수십 개의 가시가 튀어나왔다. 동시에 발 밑에서 뭐라고 묘사하기도 힘들게 생겨먹은 짐승들이 솟아나오기 시작했다. 싸구려 악몽에서도 보기 힘들 장면에 웃음이 나올 법도 했지만, 웃음보다는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가시는 그냥 공중에 둥둥 떠 있었고 짐승들은 나와 드미첸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바닥이나 자기 다리를 긁으면서 그르렁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방이라도 나와 드미첸을 향해서 튀어나갈 듯한 느낌이었다.
"아가씨가 과연 여기 있을만한 이유가 있나부터 확인해봐야겠어."
딱, 하고 다시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한때 꽤 고풍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던 통로의 모습은, 찾아온 사람이 '여기 드미첸 가 맞습니까? 고대 유적이 아니라?' 라고 말할 것 같은 모습이 되어 있었다. 천장은 아예 없어져 하늘에 걸린 달빛이 그대로 바닥으로 쏟아져 내려왔고, 기둥들은 부러지고 굵은 가시가 박힌 자국에 벌집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벽면은 금 간 자국, 구멍, 그을음, 파편 조각, 달빛에 녹아 반절이 없어진 가시, 터지고 녹아내린 동물들의 잔해 등등으로 더러워져 있었다. 전쟁터가 따로 없는 모습이었다. 제기랄, 하고 마틴은 내뱉었지만, 마법사는 총잡이의 어깨에 박힌 커다란 가시를 뽑아주기는 커녕 달빛을 등으로 받으며 마틴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무너진 기둥과 천장 조각과 한때 짐승과 가시를 이루고 있었던 검은 잔해들의 무더기 위에서 신음을 한 번 내뱉은 다음, 마틴은 마법사에게 내뱉었다.
"염병. 바닥에 곤충 표본처럼 박아놓을 거면 차라리 평평한 바닥에 해 달라고. 뚫린 데보다 등판이....더 아프잖아. 아윽.."
마틴의 말에 페머터는 어깨를 한 번 으쓱, 하고 나서는 자기 가랑이 사이를 한 번 가리키더니, 손짓을 한 번 해보였다. '남자 구실 하게 해 준 걸로도 다행으로 아는 게 좋을 걸' 이라는 의사를 상당히 '싸 보이는' 방법으로 표현한 그 손짓에 마틴은 쓴웃음을 지었다. 등판의 고통 때문에 신음인지, 헛웃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고는 마틴은 다시 마법사에게 물었다.
"........오르샤는?"
"그 마녀 아가씨라면 저기 반대편 벽에."
".....죽었냐?"
"그럴 리가. 이 몸은 목숨을 함부로 뺏지 않는다. 강자로써의 프라이드지."
"빌어먹도록 고맙다. 개자식아."
"칭찬 감사하네. 하지만 그렇다고 치료비까지 내 주진 않아. 이 몸도 생활고에 시달리는 몸이라서."
끄응, 하는 소리가 마틴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이번엔 신음소리도 헛웃음소리도 아니었다. 기가 찬다는 듯한 소리에, 마법사는 진지하다는 듯한 표정을 풀고 다시 특유의 능글능글한 표정을 지으며 내뱉었다.
"어허, 너무 많은 걸 바라면 나중에 탈 나는 법이야, 친구. 가령 나에게 치료비를 타낸다거나, 날 이기려고 한다던가. 이거 봐. 자네도 그렇고 자네 여자친구도.."
"누가 누구 여자친구야, 멍청한 자식아! 크윽.."
멀리서 들려오는 오르샤의 목소리에 마틴은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헛수고였다. 어깨에 박힌 가시, 아니 말뚝이라고 불러야 할 물건은 박혀있는 바닥이 기둥 파편, 벽 조각들에 엉망이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털끝만큼도 움직일 기미를 보여주지 않았다.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틀려는 시도를 포기한 마틴을 보며 페머터는 능글능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봐, 안 죽었다니까. 저렇게 소리도 칠 수 있을 정도라고. 자네도 불편하면 그거, 뽑아 줄까?"
"꺼져. 말뚝 대신 팔을 뽑아갈 셈이냐."
"호의를 거절하는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말야."
"마법사가 베푸는 호의는 거절이다."
"25세 이상은 맞지만 동정은 아닌데."
페머터의 말에 마틴은 멀쩡한 나머지 한 팔로 가운뎃손가락을 내밀었다. 씁쓸하다는 표정을 지은 마법사는 이윽고 지저분해진 망토를 툭툭 털고는 말했다.
"아무튼 꽤나 인상적이었어, 친구들. 전설의 마탄에, 주각탄(呪刻彈)에, 심지어는 벼락에다가 가짜 성검까지. 이런 걸 본지가 얼마나 됬더라, 기억은 안 나지만 아무튼 보기 힘든 것도 보여주고. 고맙다고 해야 되나? 아, 특히 자네. 자네 싸우는건 완전 영화던데. 칼도 쓰고 총도 쓰고 하려면 영화 꽤나 봤겠어."
"칭찬이냐, 비꼬는 거냐..아욱."
"알아서 생각하시라. 뭐, 일단 여기서 볼 재미는 다 봤고... 그럼 좀 물어볼 게 있는데, 친구."
말과 동시에 마틴의 신음소리가 마법사의 귀를 때렸다. 제기랄, 남자놈 주제에 신음소리가 뭐 이리 잦아? 라고 내뱉은 후, 페머터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딱, 하는 소리와 함께 구멍뚫린 천장 귀퉁이에 조금씩 금이 갔다. 조금씩 금이 가던 귀퉁이는 이윽고 굉음을 내면서 무너져내렸고, 귀퉁이가 떨어져나간 자리로 페머터의 등만을 적시고 있던 달빛이 마틴에게도 쏟아지기 시작했다.
"달빛이 비치고 있으니까 좀 있으면 그 말뚝은 녹을 걸."
"웬일로 반가운 소리...구만. 젠장. 그래서 물어볼 게 뭐야."
총잡이의 질문에, 달빛을 등에 진 채로 마법사는 말했다.
"드미첸 아가씨의 정체에 대해서."
눈을 감았을 때 생각난 것들.
마법이라는 것은 사실 이름과 다르게, 그렇게까지 거창한 것은 아니다. 원하는 장소에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일으킨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기 손으로 도구를 사용해서 직접 하지만, 타고난 마법사는 도구 없이 그렇게 할 수 있다. 원하기만 하면, 그리고 능력이 된다면 세상이 그 사람을 향해 힘을 빌려준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식이다. 물론 직접 하는 느낌은 뭐라고 해야 할까, 좀 더 직관적이긴 하다. 숨 쉬는 것처럼, 내가 팔을 움직이고 동물들이 꼬리를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당연히 할 수 있는 걸 한다는 느낌이다. 얼치기 마법사여서 그랬는지, 내가 수십 대를 이어온 가계에서 마법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반인도 아닌 변종이라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쓸 수 있는 마법이라곤 '딱 하나' 밖에 없긴 하지만, 그래도 그 때의 느낌은 그런 식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내가 마법사를 때려치겠다고 선언하셨을 때도 할아버지께서는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셨었다.
한 가지만 기억하거라. 너 자신이 이 세계의 법칙이고, 질서....
"!"
눈꺼풀이 강제로 말려올라가는 느낌에 눈을 화들짝 떴다. 앞에 있는 물건이고 사람이고를 떠나 전부 찢어버릴 기세로 날아오던 가시와 동물들 대신에, 처음과는 달리 밑부분부터 누가 칼로 도려낸 듯이 길이가 절반이 되어 있는 망토를 두른 마법사가 얼굴을 살짝 구긴 채로 서 있었다.
"....오호라....재밌어, 재밌군."
다시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 절반 정도 날아간 망토가 펄럭거렸다. 조금씩,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망토가 '자라기' 시작했다. 살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꿈틀거리며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망토를 힐끔 보고 난 뒤, 마법사는 살짝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들은 대로야. 하나도 틀리지 않았어. 마법사, 그것도...."
".....얼치기지만."
"아냐, 아냐. 얼치기라니. 자기 비하도 정도껏 하라고. 지금껏 내 망토를 이렇게 반절이나 지워버린 놈은 한 명도 없었어. 아니, 애초에 지우기는 커녕 건드려본 놈도 없었지. 아가씨가 최초야. 대단하다고. 몇 백년, 아니 천 년에 가까운 시간일지도 모를 시간을 버텨오면서 나나 내 선대 할아범들을 제외하면 만져본 적도 없는 놈을 지워냈단 말야. 알아?"
마법사의 목소리 톤이 점점 올라갔다. 들뜨다 못해서 격양되어가는 목소리에 불안함이 점점 더 심해지는 느낌이었다. 맨 처음 썼을 때 이후로 한 번도 써보지 않은 마법을 다시 쓴 탓인지, 속이 울렁거리기까지 했다 . 쓰는 것 자체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마치 그렇게 되는 게 당연한 것처럼, 아니, 아예 썼다, 라는 자각도 없이 그저 저절로 무언가가 이루어지는 것을 아무런 감흥 없이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쓰고 난 뒤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법 같은 걸 쓰는 놈들이 무슨 대가를 치르고 마법을 쓴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지만, 아무튼 그런 식이었다.
마법을 지워놓는다.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지만 내가 쓸 수 있는 '마법'이라고 불릴 만한 건 그거 하나뿐이다. 쓴다기보단 내가 싫어도 그렇게 '되는' 모양이고 덕분에 우리 회사에서 지원해줄 수 있는 대다수의 마법이 깃든 최강의 장비들이 죄다 고물보다도 못한 신세로 격하되는 매우 불편한 마법. 강력한 마법이 담기고 세월의 무게가 스며들은 물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간단하게 만들어낸 장비는 영원히 고철로 만들어버리기까지 하는 매우 마법사답지 못한 마법이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뿐이라는 거지만. 만일 페머터가 마법사가 아니라 전설의 성검을 휘두르는 검사였다던지, 격투에 대단한 재능을 보여주는 권사였다면 완전히 묵사발이 되고도 남았을 거다. 칼은 마법이 없어도 칼이고, 주먹은 마법이 없어도 주먹이니까.
"실망시키지 않는군, 아가씨. 듣던 대로 최강이야. 제대로 못 쓰고 있는 건 좀 유감스럽지만....좋아. 재밌어. 그럼 이제 다른 재미로 넘어가볼까."
"놀리는 건가요? 지금..."
"확인했으니 그걸로 됬어. 그럼 마지막 재미를 좀 보도록 할까. 내가 아가씨한테 하나 말했었지. 기억 나나?"
능글거리는 페머터의 말 덕분에, 잊고 있었던 것이 또 하나 생각났다. 작전이 시작되기 전, 페머터가 직접 나에게 찾아와서 예고장을 전해주면서 했었던 말.
왜, 드미첸은 굳이 심장에 화금석을 가지고 있을까?
"...왜....심장이 화금석인지...?"
"기억력이 괜찮은 편이군. 그래. 그 이야기를 지금부터 좀 시작해보자 이거지."
여전히 한껏 들뜬 목소리로, 취한 듯 그는 한 바퀴 빙글 돌며 말했다.
"거기 계신 드미첸 아가씨의 정체부터 이야기하면 되겠군."
마법사의 말에도 드미첸의 얼굴은 요지부동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호문클루스."
낡고 해진 마법의 망토를 두른 마법사는 달빛을 받으며 긴 머리의 청년에게 말했다. 긴 머리의 청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대답 대신이라는 듯 담배에 불을 붙일 뿐이었다.
"조금 거친 표현으로는 주제넘게 신을 모방하려는 정신나간 연금술사 놈들이 잡동사니와 말하기 역겨운 재료들과 피, 혼을 구겨넣고 주물럭대서 만든 인형 쯤 되겠지."
"확실히 많이 거친 표현이군요. 저희 가게에서 나간 물품이 그 정도로 혹평을 들을 줄은 몰랐습니다."
"아, 그랬나? 미안하군. 그 정도로 혹평할 생각은 없었는데. 확실히 당신들이 만든 물건은 걸작이지. 내가 여지껏 만난 인형사들보다 더 뛰어나더군. 에클리세 가의 살인인형보다 뛰어난 물건을 만들 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고. 아무런 정보도 없고, 샘플도 없이 완벽한 복제를 만들어낼 줄이야. 게다가...."
"그 이상은 말씀하시지 않으시는게 서로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만, 제 생각이 틀렸습니까?"
"무슨 허튼 소리를. 난 이미 정신나간 놈이라고. 정신건강 같은거 생각할 만한 단계는 지났어. 당신도 그렇지 않나?"
마법사의 말에 청년은 귀찮다는 듯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집어 담뱃재를 털었다. 툭, 하고 담뱃재가 담배 끄트머리에서 떨어져나가는 소리와 동시에 청년은 담배연기를 허공에 내뱉었다. 하얀 달빛에 반사된 하얀 연기가 마법사와 청년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청년은 무덤덤한 말투로 마법사에게 대꾸했다.
"훌륭하군요.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물론 점주로써의 체면이 있으니 긍정도 하지 않겠습니다만... 그래도 대단하군요. 한 번에 그 정도까지 꿰뚫어볼 줄이야."
"괜히 일류 마법사가 아니지. 뭐 각설하고, 하나 물어보도록 할까. 왜 동력원이 화금석이지?"
"혼을 고착시키는 데에는 그걸 따라갈 수 있는 물건이 없으니까. 만족스러운 답변이 됬습니까?"
"너무 함축적인데."
페머터의 말에 처음으로 청년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미간을 살짝 구긴 채로 담뱃재를 아예 손가락으로 털어버리고는, 청년은 여전히 무덤덤하게, 하지만 아까 전보다는 약간 더 진지함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마법사에게 대답했다.
"우리는 죽은 사람을 살릴 순 없습니다. 혼,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혼의 '기억' 을 불러올 수는 있지만......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죠. 신심이 깊은 의뢰주에게 그런 사념 조각만을 데리고 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자칫하다 소멸해버리기라도 하면 우리 의뢰는 완전히 오박살이 나실 테니까요."
"좋아. 그래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딸을 보고 싶다' 라는 의뢰를 포기할 수도 없고. 골치아플 따름이죠. 그 때의 의뢰주는 꽤나 까다로우신 분이었습니다. 비록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우리에게 의뢰를 하기는 했지만, 우리가 맨 처음에 제안하려고 했던 것들, 뭐 그러니까 강령이라던지, 인형 제작이라던지 하는 것은 가능한한 배제하는 방향으로 보게 해 달라고 하더군요. 어이가 없지 않습니까? 이미 죽은 사람은 무엇으로도 돌아올 수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딸과 완벽하게 닯은 사람을 찾으라는 것도 어불성설이고. 얼굴을 깎고 말투를 고친 다음 연기를 가르치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걸 바랬다면 애초에 의뢰주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의뢰를 하지 않았을 겁니다. 드미첸 자신이 가진 재력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으니까요."
"골치아팠겠군."
"매우 골치아픈 일이었습니다. 기술력은 둘째치고 의뢰주를 설득하는 게 문제였죠. 가엾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담뱃재를 털어 더 이상 타지 않는 꽁초에, 루인은 다시 불을 붙이고 한 모금을 빨아 내뱉었다. 내뱉은 연기가 달빛에 하얗게 표백되고 있었다.
달빛에 하얗게 물든 듯한 연기는 금세 허공으로 흩어져버렸다. 그림자로 이루어진 가시와 동물들의 잔해들을 녹이고, 연기와 바닥의 파편과 돌조각들을 하얗게 물들이는 달빛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맛없군. 만물가게 점주 양반 말마따나 도데체 이런 걸 태우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단 말이야."
"남의 담배 태우면서 그 따위로 말할 거면 차라리 나한테 한 개비 좀 물려 주지 그래."
"승자께서 전리품을 음미할 권리를 좀 행사하시겠다는데...어허."
달빛이 비치는 데도 마틴의 어깨에 박힌 말뚝은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녹기는 녹았지만, 겉으로 삐져나온 부분만 녹아버렸을 뿐 어깨를 뚫고 땅에 박혀있는 부분은 여전히 달빛에 녹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법사는 그 와중에 땅에 떨어진 담배를 주워서 한 개비를 꺼냈다. 다 구겨지고 그을은 자국까지 보이는 담뱃갑이었지만, 페머터가 뽑은 담배 한 개비는 구겨진 담뱃갑에서 뽑은 담배치고 썩 괜찮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후, 하고 다시 담배연기를 내뱉은 페머터는 고개를 숙여 바닥에 꽂힌 마틴을 향해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그래서?"
"어느 드미첸?"
"뭐야. 우리가 아는 드미첸 말고 다른 드미첸이 또 있나?"
"성만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뭐,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없지만. 상관 없겠지."
다시 후, 하고 담배연기를 내뿜은 페머터는 마틴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페머터가 내뿜은 담배연기를 정면으로 뒤집어 쓴 마틴은 기침을 내뱉었다. 콜록, 콜록, 하는 소리와 약간의 신음소리, 숨 쉬는 소리 등등만이 지나간 뒤, 마틴은 천천히 고개만을 들어 페머터를 올려보며 말했다.
"글쎄. 영감에 대해서는...... 이기적이라고 말해야 되나, 아니면 가엾은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당신같이 불사(不死)의 존재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나는 그 영감태기에 대해서 뭐라고 품평할 처지가 못 된다고. 같은 인간이란 말야. 죽음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죽음이라는 개념은 나도 알고 있지."
"미안하지만 난 그걸 바로 옆구리에 끼고 있는 사람이라."
침묵이 흘렀다. 빈 담뱃갑을 구기고는, 페머터는 구겨진 담뱃갑을 땅바닥에 던졌다. 툭, 하고 구겨진 담뱃갑이 다 망가지고 엉망이 된 모습의 바닥과 키스하는 소리와 함께, 마법사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마틴의 얼굴 앞에 자신의 얼굴을 놓고는 천천히,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그 가엾은 인형은 어떻지?"
마법사의 말에 마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금방이라도 어깨에 박힌 검은 말뚝을 뽑아버리고 권총을 잡아 마법사의 머리를 날려버릴 것만 같은 분노가 마틴의 얼굴에 자리잡았다. 물론 마틴은 행동파였고 실제로도 그렇게 하기를 시도했지만, 아직 제대로 녹지 않은 말뚝은 여전히 그의 어깨를 엉망진창인 바닥에 그대로 고정시켜놓을 뿐이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씹어먹을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마틴의 눈길을 신경쓰지도 않은 채 마법사는 여전히 그에게, 집요하게 질문했다.
노인이 원했고, 루인이 만들었고, 당신이 '전달한' 완벽한 행복의 대체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단지 한 명의 고독감과, 아무도 어길 수 없는 자연의 준엄한 법칙을 무시하길 바랬던 이기심을 이유로, 추억으로만 남았어야 할 기억을 가공해 만든 인공적이고 맹목적인 사랑, 가짜 삶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망자의 혼을 모독한, 안식에서 강제로 꺼내진 인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진짜...인가요."
물론, 이라는 마법사의 간단한 한 마디가 돌아왔다. 그리고 동시에, 가슴 속에 무언가 날아와 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맙소사. 이럴 수는 없다. 정적 속에서 나는 필사적으로 비스콘티 드미첸의 얼굴을 쳐다봤다. 설마 이 정신나간 마법사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건 아니겠지? 딸을 잃었던 아크 드미첸이 각본을 쓰고, 루인이 연출한 싸구려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제발. 아니라고 말해줘요. 이 마법사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길, 당신이 당신의 의지대로 '아버지'를 선택한 것이기를, 가여운 노인을 위해서라도, 그를 위해서 노력했던 루인을 위해서라도, 당신을 위해서 저 마법사에게 돌진했던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제발 내가 마틴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해 줘요. 제발, 제발.........
".....맞아요. 미안해요."
너무나도 무덤덤한 목소리로, 비스콘티 드미첸은 내가 가지고 있던 일말의 희망을 박살내버렸다. 울컥, 하는 느낌과 함께 눈물이 쏟아져나올 것 같았다. 지금까지의 이야기에 의심을 품었던 나 자신이 혐오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마틴이 옳았다. 다른 사람들이 옳았고 굳이 알면서도 나에게 말하지 않으려 한 드미첸이 옳았다. 우리는 의뢰주가 고용한 개들이니까. 주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어도 우리는 주인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고, 따라서 어떤 이야기인지 알 수 없어도 우리는 일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개가 아니다'. 당장에 어떤 이야기가 있고, 주인의 생각이 마뜩치 않다면 우리는 일을 할 수 없고, 주인의 명령을 따라 이빨을 들이댈 수 없다.
하물며, 이런 이야기를 듣고서야 어떻게? 뒤로는 당연히 갈 수 없다. 하지만 앞으로 갈 수도 없다. 화금석을 빼내고 그녀의 짐을 내려놓게 하는 것이 최선인가? 아니면 그대로, 그녀가 가짜이건 뭐건, 일단 화금석을 마음대로 쓸 개자식들이 뛰노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남겨둬야 하나? 내가 만약에 익스프레스의 직원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런 이야기 따위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신은 공짜로 일을 해결하게 놔두지 않는다. 준엄한 목소리로 신이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작게로는 가엾은 한 사람의 인생이, 크게로는 이 세계의 혼란이 걸렸다. 어쩔 거지? 선택권은 너에게 있다. 선택해라. 책임질 수 있다면.
물론 나는 선택할 수 없다. 책임을 질 수 없으니까.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책임을 지기 싫다는 게 솔직한 말일 거다.
"맞아요. 저는 그저 인형이죠. 위대한 연금술사의 기술을 훔치고, 위대한 마법사의 소산을 훔치고, 위대한 이 세상에게서 죽은 자를 훔치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어야 할 망자의 혼을 파헤쳐 만든 기억으로 움직이는 인형 말이에요."
드미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 하지만 목소리 끝에서는 쓸쓸함이 느껴졌고 말은 메말라 가루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진짜 딸이 죽었을 때가 열 두살이라고 했던가요, 저의 나이는 다들 열 일곱이라고들 알고 있죠. 맞아요. 동시에 틀린 이야기지만. 인형으로써의 제 나이는 다섯 살이에요.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열 두살이었으니까, 더해서 열 일곱. 깨어나서 단순히 아버지의 죽은 딸 대용품으로 살아왔던 게 딱 일 년, 그 이후로 진짜 아버지의 딸이 되었던 게, 아니, 적어도 제가 생각하기에 그렇게 느꼈던 게 그 뒤로 사 년."
"이유는 뭐지, 깜찍한 아가씨?"
"아버지를 직접 본 건 딱 1년뿐이었어요. 1년이 지나고 나서, 아버지께서는 다 이루셨다는 듯이 세상을 떠나셨죠. 단 1년밖에 보지 못했는데도, 진짜 딸도 아니고 딸의 대용품이었을 뿐이었는데도, 저는 그 1년간의 아버지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요. 정말 죽었던 딸이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 듯이 그렇게 기뻐하던 모습을요."
"오호."
"비록 이전의 기억들은 제 심장에 갇힌 혼으로부터 나왔던 것들이고, 그건 엄밀히 말해서 제 것이 아니죠. 하지만 그 1년간 제가 아버지에게 받았던 사랑은 온전히 저만의 것이었어요. 제 이전의 딸에게만 있었던 게 저에게도 생겼던 거죠. 그래서 기뻤어요. 비록 1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아크 드미첸이, 진짜 딸을 흉내낸 조잡한 인형에게도, '나는 너의 웃는 모습이 가장 보기 좋단다.' 라고 말해줬으니까요. 그건.............
그래요. 제가 가진 모든 게 제 것이 아니고 심지어는 가짜일지 몰라도, 적어도 그것만큼은 저만이 가지고 있는 진짜에요."
말을 끝마치고, 비스콘티 드미첸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홀가분하다, 이젠 다 말했다, 라고 말하는 듯이, 작고 조용하지만 깊은 한숨이었다. 그리고, 내 눈에선 결국 눈물이 흘러내렸다. 당장에라도 권총을 던져버리고 앉아서 울고 싶었다.
너무하잖아요. 이런 건.
루인의 말에 페머터는 인상을 찡그렸다. 짜증이 나거나 분노가 치밀어오른다기보다는,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에 더 가까운 표정이었다.
"황당하군. 그래서야 신심좋은 사람이고 뭐고 완전히 미친 노친네잖아."
"글쎄요? 뭐 그래도 인간답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나는 이미 인외(人外)라서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 노친네가 마지막까지 부탁한 건 뭐였지? 그냥 장례식이나 좀 번지르르하게 치뤄주쇼, 같은 건 아니었을 텐데."
마법사의 말에 루인은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다 구겨지고 찌그러진 담뱃갑이었지만 놀랍게도 그 안에서는 하나도 구겨지지 않은 새 담배 한 개비가 뽑혀나왔다. 새 담배에 다시 불을 붙이며, 루인은 마법사에게 대답했다.
"처리 방법은 세 가지였습니다."
"...........인간이었을 때 기억이 떠오르려고 하는군. 이미 죽은 영감에게 욕 하는건 예의에 어긋나던가?"
"인외시니까 알아서 하십시오. 아무튼 첫 번째로는 그 심장을 빼내고 화금석을 부숴 혼을 해방시키는 것. 두 번째로는 영원히 놔두어 화금석을 보호하는 것.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게, 누군가가 훔쳐가려는 일 없이. 물론 당신도 알다시피 반쯤 실패하기야 했습니다마는."
"뭐야. 그럼 왜 첫 번째로 이행하지 않고?"
"책임지기 귀찮으니까요. 그리고 아직 말 안한 세 번째 방법도 있었고. 물론 이것도 책임지기 귀찮아서 쓰진 않았습니다. 저희 가게는 물건만 팔면 그만이다라는 신조를 가지고 있어서."
"세 번째 방법이라고?"
마법사의 질문에 루인은 또박 또박, 토씨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정확한 발음으로 세 번째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페머터는 폭소를 터트렸다. 유쾌한 웃음도 쓴웃음도 아닌, 실소였다.
"..........그런 고로, 재미의 끝을 보기 위해서 나는 아가씨에게 선택권을 줄 예정이야. 아까 전에 말했던 것과 같지. 하나가 더 있긴 하지만."
"..........바로, 첫번째로 이행하는 게 아니라?"
"제작자도 책임지지 않겠다는데 내가 책임을 져야 하나? 저기 밖에서도 말하기는 했지만, 나한테 화금석은 부차적인 문제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뭐, 만물가게 쪽에다가는 찾아오겠다고 허세를 조금 부리기는 했지만- 이라고, 페머터는 순순히 대답했다. 눈물의 급류가 흐르고 지나간 눈은 개운하기는 커녕 오히려 쓰리고 뻑뻑한 느낌마저 들었다. 마법사의 망토 뿐만이 아니라, 페머터의 모습 자체가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일렁거림에 맞추듯이, 시라도 읆는 것처럼 마법사는 엄숙한 목소리로 나에게 선언했다.
첫 번째, 화금석을 부수겠는가,
두 번째, 아니면 그 화금석을 영원히 지키겠는가,
그리고 세 번째.
세 번째의 설명을 듣는 순간 나는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개운하지만 뒷맛이 씁쓸한, 허탈한 웃음이었다. 제기랄, 맙소사. 정말 이걸 골라야 한다고?
샛길을 만들어준 신과, 친절하게 샛길이 있다고 알려준 루인과, 인심이라도 쓰듯이 샛길로 가라고 가르쳐준 페머터에게 동시에 저주를 퍼부으며,
나는 세 번째를 선택했다.
에필로그가 남았습니다. 네. 디데이가 이제 1이야...... 시바븗르벌브릅르



덧글
팅뤠 2009/09/06 11:03 # 답글
!!!!!!!!!!!!!!!!!!!!!!!!!!!그저 경배() 역시 마틴은 까야 제맛이군여 키키ㅣ키키키킼 페머터도 짱 멋지고O<-< ....어 음 따,딱히 주인공 네가 좋아진건 아니야 그치만 너님 멋지네 ㅋ..............<<<< 에필로그를 기다려봅니다;ㅁ;...힘내!
붉은바람 2009/09/06 18:41 #
독박쓴 주인공의 압박요. 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