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큰 사랑을 베풀 줄 알았던 사람이
이 곳에 영면하다'
-아크 드미첸의 묘비명.
"그래서........."
"결국 그들은 화금석이 더 이상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게 됬고, 우리는 화려했던 실적들에 또 다른 오점을 남기게 됬고, 만물가게는 VIP를 잃었죠. 재계의 혼란은 덤."
"배드 엔딩이군."
"뭐, 어쩌겠어요. 최후의 보루께서 내리신 선택인데 존중해야겠죠. 그래도 혼자 덤태기 쓴 것보단 낫잖아요?"
"독박을 나눠 맞았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건가. 뭐,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묘비 앞에는 한 소녀가 서 있었다.
이제야 한 열여섯, 열일곱 정도 됬을 외모에 평범한 복장. 하지만 비가 오는 날에 비옷도, 우산도 없이 서 있는 모습을 평범하다고 하기는 조금 어려울 것 같았다. 벌써 오래 전부터 그렇게 서 있었던 모양인지, 소녀의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입고 있던 옷마저 비에 푹 절어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비를 맞으며 묘비를 바라보고 있던 소녀의 곁으로, 한 청년이 다가갔다. 검은 색 우산에 온통 검은 색 일색인 정장을 입고, 긴 머리를 뒤로 묶은 청년이었다. 꽃이나 향 대신에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피를 꺼내 불을 붙이고 묘비 앞에 둔 청년은, 비를 맞고 있던 소녀에게 다가가 우산을 씌워 주며 말을 걸었다.
"아는 사람의 묘니?"
"아니요."
그렇구나, 하며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색 우산을 조심히 소녀의 손에 쥐어주고 몸을 돌려 묘지에서 떠나려는 찰나,
-누군진 모르겠지만, 그리운 느낌이 들어요.
청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비를 맞으며 묘지를 빠져나갔다.
"어, 잠깐. 뭘.......지웠다고?"
"말 그대로. 드미첸이었을 때의 기억만 통째로 날려버리는 거지. 뭐, 루인이 직접 그렇게 했다면 약간 다른 절차긴 했겠지만."
"뭐야, 제작자라면서. 쉬운 거 아닌가, 그러면?"
"아무리 실력좋은 제작자래도 이미 다 만들어놓은 물건에서 특정 부분만 날려 버리는건 쉬운 게 아니라고. 컴퓨터가 아니란 말야."
".....잘 이해가 안 가는데."
"마트로쉬카(러시아 인형) 뚜껑 안 열고 가장 안 쪽에 있는 인형만 꺼내는거, 너 할 수 있냐?"
"그걸 어떻게 해?"
"그런 거하고 비슷한 거야. 물론 그 녀석이야 특이한 녀석이니까 가능했겠지."
"마법을 지우는게 뭐가?"
"화금석은 그 자체가 마법이고 신비니까."
".....이해가 안 되는데. 끄응. 그나저나 하나 더. 그 예고장은 언령(言靈)이랬나, 아무튼 자물쇠 같은 거라면서."
"그렇지."
"그런데 그 녀석은 왜 마지막에 그럼 그걸 뽑아가지 않은 거야?"
오르샤의 질문에 아스티아는 다 구겨진 '예고장' 을 얼룩진 가운 주머니에서 꺼냈다. 예고장을 쓰레기 던져넣듯이 던져주며 아스티아는 말했다.
"마지막 부분만 잘 봐."
아스티아의 말에 오르샤는 마지막 부분을 자세히 봤다. 그리고 몇 초 후, 그녀는 폭소를 터트렸다.
다 구겨진 예고장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바뀌어 있었다.
'화금석을 회수한다 화금석은...책임지는 놈이 나오면 그 놈에게 떠맡기도록 한다.'
비가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쓰고 있는 우산을 거세게 때리는 빗소리를 배경 삼아서 나는 마법사에게 말했다.
"물어볼 게 있어요."
"뭔데."
"왜 하필 제가 책임을 져야 했던 거죠?"
나의 질문에 페머터는 뭘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듯한 눈길로 쳐다봤다. 나는 다시 한 번 귀에 대고 마법사가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을 때까지 이야기했고, 마법사는 그제서야 귀를 후비면서 질문에 대답했다.
"아가씨 말고는 책임지려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거에요?"
"이봐, 내가 그 맨 처음에 예고장 보냈을 때 기억 안 나나? 별 거 아냐. 사실 기대도 안 했었지. 공평하게 하려면 아가씨에게도 일단 드미첸이 어떤 존재인진 알고 시작했어야 된다, 뭐 그런 거지. 아가씨 빼고 다들 잘 알고 있었다고. 문제가 있다면 화금석에 대해서는 잘 알아도 전부 책임지려고 하진 않았지. 관심도 가지지 않았고."
"다 안다는 듯이 말하네요. 그럼 그렇게 될 걸 알고 있었으면서, 당신은 왜 그랬던 거에요?"
"아니, 몰랐어. 기대도 안 하고 있었다니까. 아무도 책임지려고 하지 않았으면 난 그냥 그대로 화금석 뽑아서 만물가게에 던져놓고 갈 생각이었지. 어느 한 명이 책임진다고 하면 그거에 맞춰서 좀 도와주기로 했고. 심장을 뽑겠다면 뽑고, 지킨다고 하면 난 그냥 포기하고 가고, 나한테 일거리를 던져놓은 머저리 놈들을 죄다 땅 속에 묻어버리고 왔겠지. 근데 아가씨는 좀 솔직히 좀 의외였어. 세 번째를 고를 줄이야. 애초에 뭐, 아가씨의 그 괴물 같은 능력이 없었으면 세 번째는 말도 안 꺼냈겠지만."
".....말은 잘 하셔."
"왜. 어쨌든 잘 했어. 아무도 만족시키지 못한 선택이긴 하지만."
페머터의 말에 쓴웃음이 나왔다.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 했다. 드미첸은 직접 짊어지엔 너무 무거운 문제였기 때문에 책임질 수 없었고, 익스프레스는 일 때문에 의도적으로 책임을 무시했고, 만물가게는 책임을 거부했고, 마법사는 애초에 책임을 질 만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책임을 지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모두가 미룬 책임을 덤터기 쓰듯이 뒤집어쓴 나는, 그 중 아무도 만족하지 못할 선택을 했다. 익스프레스는 의뢰 실패라는 오점을 얻었고, 만물가게는 VIP를 잃었고, 페머터는 의뢰주들에게 사기꾼이라는 평판을 얻었고, 그 의뢰주들은 화금석을 얻을 기회를 날려 버렸고, 드미첸 가는 단 한명밖에 없었던 상속자를 잃고 법조문과 잉크와 서류가 총알 대신 날아드는 전쟁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아니, 비스콘티 드미첸 쪽은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과연 드미첸 쪽은 만족할까요?"
"어느 드미첸?"
"우리가 아는 드미첸 말고 다른 드미첸이 또 있어요?"
"성만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뭐,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지만."
나의 말에 마법사는 우산을 겨드랑이에 끼고는, 주머니에서 다 구겨진 담뱃갑을 꺼냈다.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페머터는 담배를 그대로 피는 대신 묘비 앞에 조화나 향 대신이라도 된다는 양 내려놓았다. 옷자락에 묻은 담뱃재와 물방울을 탁, 탁, 털고는 페머터는 나에게 말했다.
"후회되나?"
"만 번 쯤요."
말하면서도 입에 쓴 맛이 도는 것 같았다. 화금석이 반쯤 지워지면서 안에 갇혀 있던 '진짜' 비스콘티 드미첸의 혼은 없어졌다. 드미첸의 혼을 가지고 있었던 또 다른 드미첸의 기억도 동시에 사라졌다. 뭐, 직접 그걸 '지운' 사람이 이런 감상을 말해봤자 사람 죽여놓고 후회하는 정도밖에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입맛이 씁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과연 그 방법밖에는 없었을까? 드미첸이란 이름은 이제 그 소녀의 입에서 생소한 이름이 될 테고 그렇게, 반쯤 지워진 불완전한 화금석이 언젠가 전부 소모되어 평범한 돌덩어리가 될 때까지 그녀는 그냥 평범한 한 사람의 소녀로 살겠지만-
그녀가 일 년동안 얻었고, 사 년동안 간직했던 '진짜 아버지의 사랑' 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으니까.
아무도 죽지도 않고, 순리는 순리대로 돌아갔을 뿐이지만.
"제가 그렇게 한 게 잘 한 짓이었을까요."
"왜?"
"결국 스스로 선택할 기회를 주지 않았잖아요. 앞으로 스스로 살아가야 할 거라고 말했으면서."
"한 가지 착각하고 있는 게 있는 거 같은데."
"예?"
"드미첸이 스스로 책임을 지고 선택하려고 했다면 아가씨가 책임을 질 일은 없었어. 원래 그런 거라고. 밀리고 밀린 책임이 아가씨한테 왔다는 걸 잊지 말라고."
담배를 한 개피 더 꺼내 불을 붙인 후, 한 모금을 빨아 내뱉으면서 페머터는 말했다. 다 같이 가해자야, 우리는.
가자. 마법사의 말에, 우리는 비 오는 묘지를 떠났다. 비가 그칠 기미도 없이 계속 그렇게 내리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묘지에 홀로 서 있는 묘비에는 그렇게 써 있었다.
'비스콘티 드미첸
작지만 가장 커다란 사랑을 받았고,
가장 커다란 사랑을 간직하고 있었던 사람
그에게 안식이 있기를'
빗방울이 거세게 묘비를 때리는 날씨 속에서,
향이나 조화 대신 바쳐진 두 개비의 담배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드디어 질질 끌어왔던 익스프레스 한 편이 끝났습니다. 입대 전에 끝낼 수 있어서 홀가분하네요.
이제 저는 그러면 이 글을 마지막으로 -_- 국가의 부름 퀘스트를 수행하러 갔다오겠습니다.
그동안 졸작 읽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뭐 죽으러 가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튼 잘 갔다오겠습니다!



덧글
xizang 2009/09/06 17:02 # 삭제 답글
주인공은 왜 이리 박복한가요;;잘 다녀와요;ㅁ;)/
붉은바람 2009/09/06 18:44 #
결국 주인공에게도 배드 엔딩인 셈이죵. 책임을 지게 됬으니....넵 잘 다녀오겠습니다!
히테이 2009/09/06 18:35 # 답글
헉 페머터쨔응ㅠㅠㅠ 뭐지 이전까지는 그냥 음 그렇군, 이랬는데ㅠㅠㅠ 마지막 화에서 무네돗큥이네여ㅋㅋ잘 다녀오고 주소 나오면 2차 창작 보내드립니다ㅋㅋㅋ하악 오르샤땅 ‘ A `)*
붉은바람 2009/09/06 18:46 #
결국 책임지지 않을 뿐더러 은근슬쩍 주인공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납흔 마법사 [....]오르샤 좋죠. 저도 좋아합니다. 어?!
팅뤠 2009/09/06 21:01 # 답글
페머터 짱귀여움() 하악하악하악<- 주인공도 애정도가 상승했지만 어째 너도 까일 상이다? ....미안하다<-잘 다녀오고;ㅅ;/ 2차 창작은............훗<
붉은바람 2009/09/06 22:11 #
책임지는 놈이 덮어 쓰기로 한다. 우왕ㅋ굳ㅋ짱귀엽긔...........는 훼이크고 난 남자놈에 관심없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잘 갔다오겠습니당. ㅋ!
이루엘 2009/09/06 21:38 # 답글
대망의 완결이군. 잘 읽었음.태그가 적절한듯.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주인공 혼자 덤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