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및 작업물 Hermes Express / Ep 2009/09/06 11:51 by 붉은바람

'가장 큰 사랑을 가슴에 품은,
가장 큰 사랑을 베풀 줄 알았던 사람이
이 곳에 영면하다'

-아크 드미첸의 묘비명.








"그래서........."
"결국 그들은 화금석이 더 이상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게 됬고, 우리는 화려했던 실적들에 또 다른 오점을 남기게 됬고, 만물가게는 VIP를 잃었죠. 재계의 혼란은 덤."
"배드 엔딩이군."
"뭐, 어쩌겠어요. 최후의 보루께서 내리신 선택인데 존중해야겠죠. 그래도 혼자 덤태기 쓴 것보단 낫잖아요?"
"독박을 나눠 맞았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건가. 뭐,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

묘비 앞에는 한 소녀가 서 있었다.
이제야 한 열여섯, 열일곱 정도 됬을 외모에 평범한 복장. 하지만 비가 오는 날에 비옷도, 우산도 없이 서 있는 모습을 평범하다고 하기는 조금 어려울 것 같았다. 벌써 오래 전부터 그렇게 서 있었던 모양인지, 소녀의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입고 있던 옷마저 비에 푹 절어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비를 맞으며 묘비를 바라보고 있던 소녀의 곁으로, 한 청년이 다가갔다. 검은 색 우산에 온통 검은 색 일색인 정장을 입고, 긴 머리를 뒤로 묶은 청년이었다. 꽃이나 향 대신에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피를 꺼내 불을 붙이고 묘비 앞에 둔 청년은, 비를 맞고 있던 소녀에게 다가가 우산을 씌워 주며 말을 걸었다.

"아는 사람의 묘니?"
"아니요."

그렇구나, 하며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색 우산을 조심히 소녀의 손에 쥐어주고 몸을 돌려 묘지에서 떠나려는 찰나,

-누군진 모르겠지만, 그리운 느낌이 들어요.

청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비를 맞으며 묘지를 빠져나갔다.

******


 

"어, 잠깐. 뭘.......지웠다고?"
"말 그대로. 드미첸이었을 때의 기억만 통째로 날려버리는 거지. 뭐, 루인이 직접 그렇게 했다면 약간 다른 절차긴 했겠지만."
"뭐야, 제작자라면서. 쉬운 거 아닌가, 그러면?"
"아무리 실력좋은 제작자래도 이미 다 만들어놓은 물건에서 특정 부분만 날려 버리는건 쉬운 게 아니라고. 컴퓨터가 아니란 말야."
".....잘 이해가 안 가는데."
"마트로쉬카(러시아 인형) 뚜껑 안 열고 가장 안 쪽에 있는 인형만 꺼내는거, 너 할 수 있냐?"
"그걸 어떻게 해?"
"그런 거하고 비슷한 거야. 물론 그 녀석이야 특이한 녀석이니까 가능했겠지."
"마법을 지우는게 뭐가?"
"화금석은 그 자체가 마법이고 신비니까."
".....이해가 안 되는데. 끄응. 그나저나 하나 더. 그 예고장은 언령(言靈)이랬나, 아무튼 자물쇠 같은 거라면서."
"그렇지."
"그런데 그 녀석은 왜 마지막에 그럼 그걸 뽑아가지 않은 거야?"

오르샤의 질문에 아스티아는 다 구겨진 '예고장' 을 얼룩진 가운 주머니에서 꺼냈다. 예고장을 쓰레기 던져넣듯이 던져주며 아스티아는 말했다.

"마지막 부분만 잘 봐."

아스티아의 말에 오르샤는 마지막 부분을 자세히 봤다. 그리고 몇 초 후, 그녀는 폭소를 터트렸다.
다 구겨진 예고장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바뀌어 있었다.

'화금석을 회수한다 화금석은...책임지는 놈이 나오면 그 놈에게 떠맡기도록 한다.'

******


 

비가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쓰고 있는 우산을 거세게 때리는 빗소리를 배경 삼아서 나는 마법사에게 말했다.

"물어볼 게 있어요."
"뭔데."
"왜 하필 제가 책임을 져야 했던 거죠?"

나의 질문에 페머터는 뭘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듯한 눈길로 쳐다봤다. 나는 다시 한 번 귀에 대고 마법사가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을 때까지 이야기했고, 마법사는 그제서야 귀를 후비면서 질문에 대답했다.

"아가씨 말고는 책임지려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거에요?"
"이봐, 내가 그 맨 처음에 예고장 보냈을 때 기억 안 나나? 별 거 아냐. 사실 기대도 안 했었지. 공평하게 하려면 아가씨에게도 일단 드미첸이 어떤 존재인진 알고 시작했어야 된다, 뭐 그런 거지. 아가씨 빼고 다들 잘 알고 있었다고. 문제가 있다면 화금석에 대해서는 잘 알아도 전부 책임지려고 하진 않았지. 관심도 가지지 않았고."
"다 안다는 듯이 말하네요. 그럼 그렇게 될 걸 알고 있었으면서, 당신은 왜 그랬던 거에요?"
"아니, 몰랐어. 기대도 안 하고 있었다니까. 아무도 책임지려고 하지 않았으면 난 그냥 그대로 화금석 뽑아서 만물가게에 던져놓고 갈 생각이었지. 어느 한 명이 책임진다고 하면 그거에 맞춰서 좀 도와주기로 했고. 심장을 뽑겠다면 뽑고, 지킨다고 하면 난 그냥 포기하고 가고, 나한테 일거리를 던져놓은 머저리 놈들을 죄다 땅 속에 묻어버리고 왔겠지. 근데 아가씨는 좀 솔직히 좀 의외였어. 세 번째를 고를 줄이야. 애초에 뭐, 아가씨의 그 괴물 같은 능력이 없었으면 세 번째는 말도 안 꺼냈겠지만."
".....말은 잘 하셔."
"왜. 어쨌든 잘 했어. 아무도 만족시키지 못한 선택이긴 하지만."

페머터의 말에 쓴웃음이 나왔다.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 했다. 드미첸은 직접 짊어지엔 너무 무거운 문제였기 때문에 책임질 수 없었고, 익스프레스는 일 때문에 의도적으로 책임을 무시했고, 만물가게는 책임을 거부했고, 마법사는 애초에 책임을 질 만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책임을 지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모두가 미룬 책임을 덤터기 쓰듯이 뒤집어쓴 나는, 그 중 아무도 만족하지 못할 선택을 했다. 익스프레스는 의뢰 실패라는 오점을 얻었고, 만물가게는 VIP를 잃었고, 페머터는 의뢰주들에게 사기꾼이라는 평판을 얻었고, 그 의뢰주들은 화금석을 얻을 기회를 날려 버렸고, 드미첸 가는 단 한명밖에 없었던 상속자를 잃고 법조문과 잉크와 서류가 총알 대신 날아드는 전쟁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아니, 비스콘티 드미첸 쪽은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과연 드미첸 쪽은 만족할까요?"
"어느 드미첸?"
"우리가 아는 드미첸 말고 다른 드미첸이 또 있어요?"
"성만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뭐,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지만."

나의 말에 마법사는 우산을 겨드랑이에 끼고는, 주머니에서 다 구겨진 담뱃갑을 꺼냈다.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페머터는 담배를 그대로 피는 대신 묘비 앞에 조화나 향 대신이라도 된다는 양 내려놓았다. 옷자락에 묻은 담뱃재와 물방울을 탁, 탁, 털고는 페머터는 나에게 말했다.

"후회되나?"
"만 번 쯤요."

말하면서도 입에 쓴 맛이 도는 것 같았다. 화금석이 반쯤 지워지면서 안에 갇혀 있던 '진짜' 비스콘티 드미첸의 혼은 없어졌다. 드미첸의 혼을 가지고 있었던 또 다른 드미첸의 기억도 동시에 사라졌다. 뭐, 직접 그걸 '지운' 사람이 이런 감상을 말해봤자 사람 죽여놓고 후회하는 정도밖에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입맛이 씁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과연 그 방법밖에는 없었을까? 드미첸이란 이름은 이제 그 소녀의 입에서 생소한 이름이 될 테고 그렇게, 반쯤 지워진 불완전한 화금석이 언젠가 전부 소모되어 평범한 돌덩어리가 될 때까지 그녀는 그냥 평범한 한 사람의 소녀로 살겠지만-

그녀가 일 년동안 얻었고, 사 년동안 간직했던 '진짜 아버지의 사랑' 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으니까.
아무도 죽지도 않고, 순리는 순리대로 돌아갔을 뿐이지만.

"제가 그렇게 한 게 잘 한 짓이었을까요."
"왜?"
"결국 스스로 선택할 기회를 주지 않았잖아요. 앞으로 스스로 살아가야 할 거라고 말했으면서."
"한 가지 착각하고 있는 게 있는 거 같은데."
"예?"
"드미첸이 스스로 책임을 지고 선택하려고 했다면 아가씨가 책임을 질 일은 없었어. 원래 그런 거라고. 밀리고 밀린 책임이 아가씨한테 왔다는 걸 잊지 말라고."

담배를 한 개피 더 꺼내 불을 붙인 후, 한 모금을 빨아 내뱉으면서 페머터는 말했다. 다 같이 가해자야, 우리는.
가자. 마법사의 말에, 우리는 비 오는 묘지를 떠났다. 비가 그칠 기미도 없이 계속 그렇게 내리고 있었다.


 

******

비가 내리는 묘지에 홀로 서 있는 묘비에는 그렇게 써 있었다.

'비스콘티 드미첸
작지만 가장 커다란 사랑을 받았고,
가장 커다란 사랑을 간직하고 있었던 사람
그에게 안식이 있기를'

빗방울이 거세게 묘비를 때리는 날씨 속에서,
향이나 조화 대신 바쳐진 두 개비의 담배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드디어 질질 끌어왔던 익스프레스 한 편이 끝났습니다. 입대 전에 끝낼 수 있어서 홀가분하네요.
이제 저는 그러면 이 글을 마지막으로 -_- 국가의 부름 퀘스트를 수행하러 갔다오겠습니다.
그동안 졸작 읽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뭐 죽으러 가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튼 잘 갔다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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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xizang 2009/09/06 17:02 # 삭제 답글

    주인공은 왜 이리 박복한가요;;
    잘 다녀와요;ㅁ;)/
  • 붉은바람 2009/09/06 18:44 #

    결국 주인공에게도 배드 엔딩인 셈이죵. 책임을 지게 됬으니....
    넵 잘 다녀오겠습니다!
  • 히테이 2009/09/06 18:35 # 답글

    헉 페머터쨔응ㅠㅠㅠ 뭐지 이전까지는 그냥 음 그렇군, 이랬는데ㅠㅠㅠ 마지막 화에서 무네돗큥이네여ㅋㅋ
    잘 다녀오고 주소 나오면 2차 창작 보내드립니다ㅋㅋㅋ하악 오르샤땅 ‘ A `)*
  • 붉은바람 2009/09/06 18:46 #

    결국 책임지지 않을 뿐더러 은근슬쩍 주인공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납흔 마법사 [....]
    오르샤 좋죠. 저도 좋아합니다. 어?!
  • 팅뤠 2009/09/06 21:01 # 답글

    페머터 짱귀여움() 하악하악하악<- 주인공도 애정도가 상승했지만 어째 너도 까일 상이다? ....미안하다<-

    잘 다녀오고;ㅅ;/ 2차 창작은............훗<
  • 붉은바람 2009/09/06 22:11 #

    책임지는 놈이 덮어 쓰기로 한다. 우왕ㅋ굳ㅋ
    짱귀엽긔...........는 훼이크고 난 남자놈에 관심없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잘 갔다오겠습니당. ㅋ!
  • 이루엘 2009/09/06 21:38 # 답글

    대망의 완결이군. 잘 읽었음.
    태그가 적절한듯.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주인공 혼자 덤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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